[한국스포츠경제 이상엽]
서울 도봉구유소년야구단/사진=이상엽 기자
서울 도봉구유소년야구단 김종진 감독의 야구 이야기는 여느 다른 프로야구선수와 다르지 않다. 초등학교 시절 야구부가 없어 전학을 가야만 했고, 눈에 띄는 활약으로 프로구단들로부터의 관심을 받았다.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프로 입단에 성공했다.
하나의 차이점은 1군에서 활약하는 소수의 선수들과 다르게 야구란 꽃을 프로에서 만개시키지 못한 다수의 선수였다는 것이다. 프로선수를 꿈꾸는 이들 중 상당수는 부상, 실력 부족, 은퇴, 개인사 등으로 프로에 입단하지 못하거나 입단하더라도 미비한 성적으로 팬들의 기억에 사라진다. 김 감독도 중고등학교 시절 무리한 투구로 부상에 시달려야 했고, 많은 야구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선수의 꿈을 접어야만 했다.
그렇다고 야구계를 떠난 것이 아니다. 프로선수로서는 남보다 먼저 꿈을 접었지만, 감독으로서 제2의 길을 걷고 있다. 프로야구선수가 연봉(수입)이나 인지도가 높을지 모르지만, 이것들이 야구인으로서의 행복의 절대기준이 되지 않는다. 아직도 1군 무대 마운드에 한 번 서보고 싶은 마음은 있지만, 야구단을 이끌며 직업야구선수보다 더 행복한 삶을 보내고 있는 그를 만나봤다.
김종진 감독은 자신의 어린 시절과 다른 요즘 아이들의 모습을 보니 행복감이 몰려온다고 한다/사진=이상엽 기자.
‘과거와 내가 야구를 하며 싫어했던 것들, 그것만 안 하면 아이들은 행복하다’
지난 7일 서울시 도봉구에 위치한 서울문화고등학교에서 초등학생 야구선수들이 코칭스태프에 따라 열심히 훈련을 하고 있었다. 바람이 많이 부는 다소 쌀쌀한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은 목청껏 기합을 넣으며 부모님들 앞에서 스스로를 단련했다.
김종진 서울 도봉구유소년야구단 감독은 “내가 초등학교 때는 야구를 참 기계적으로 했던 것 같다. 학교, 야구훈련, 집 이렇게 쳇바퀴 돌듯이 생활을 했다”며 “쉬는 날에는 야구를 한다는 것 자체를 생각하지 않았는데, 지금 아이들은 여기에서도 모자라 자기들끼리 야구를 한다. 이렇게 야구를 좋아하는데 야구단 훈련은 당연히 집중하고 열중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김 감독의 어린 시절과 요즘 아이들의 야구가 많이 달라졌다는 것을 요약할 수 있는 말이 아닌가 싶다. 어른들도 마찬가지다. 일이라고 생각하면 쉬는 날 회사의 일에 대해 생각조차 하지 않으려 한다. 하지만 일이 아닌 취미, 혹은 즐기고 좋아하는 무언가가 있다면, 자투리 시간만 나도 꼭 하려고 노력을 한다. 김 감독은 야구를 마치 일처럼 생각한 반면, 요즘 아이들은 야구를 취미로 생각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김 감독은 “내가 어린 시절 야구선수를 하면서 못했던 것, 싫었던 것이 많았다. 당시 분위기가 고압적이기도 했고, 오직 선수가 되기 위해 의사표현도 못하고 훈련에만 매진했다”며 “시대도 바뀌고 지도자들의 마인드도 많이 바뀌었다. 나도 마찬가지다. 아이들과 대화를 하려고 한다. 단순히 물어보는 것에 ‘네, 아니오’로 대답하는 것이 아닌,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포함해서 이야기할 수 있도록 한다. 그러면 나중에 본인 스스로 하고 싶은 말을 나에게 이야기를 하게 되고, 궁극적으로는 원활한 소통이 이뤄지게 된다. 스스로 표현을 하니 야구도 즐거워 질 수 있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서울 도봉구유소년야구단은 즐길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드려고 항상 노력한다/사진=이상엽 기자.
서울 도봉구유소년야구단은 대한유소년야구연맹 소속 야구단 중에서 강팀으로 속한다. 지난해 열린 한국스포츠경제배 전국유소년야구대회에서도 꿈나무리그 우승을 차지할 정도로 실력을 인정 받는 팀이다. 그러나 김 감독은 의외로 야구 성적에 대해 팀원들에게 강조하지 않는다.
그는 “초등학생들에게 야구의 전문적인 기술이나 지식을 가르쳐봐야 질릴 뿐이다. 오히려 반감이 생긴다. 나중에 중학교나 고등학교에 진학해서는 제 풀에 꺾여 야구를 그만두는 경우도 많다”며 “지금은 이 어린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야구를 통해 즐기고 재미를 주는 것이 중요하다. 또한, 야구를 통해 배울 수 있는 단체 생활 속 인간관계, 예절 등 교육적인 내용을 녹여내면, 본인이 야구선수를 하려고 하든 나중에 사회생활을 하든 도움이 된다”고 밝혔다.
김 감독의 야구철학은 과거의 경험이 큰 자산이 됐다. 야구 유망주로 일찍 꽃을 피웠지만, 오히려 그 점이 독이 됐다. 만약 어린 시절의 김 감독이 지금처럼 표현의 자유를 가졌거나 야구를 생각하는 것에 약간의 여유를 가졌다면, 부상으로 꿈을 접어야 했던 수많은 유망주들과 다른 길을 걸었을 가능성도 있다.
김 감독은 “나의 초등학교 시절에는 대회도 평일에 진행되는 경우가 많았다. 하루 이틀 수업에 빠지면, 나중에는 격차가 벌어져 따라갈 수가 없었다. 또, 하루에 5~6시간 정도 훈련을 했는데, 어른들도 그 시간 내내 집중할 수 없는 시간이다”라고 주장한다.
이어 “내가 초등학교 때부터 겪어왔던 야구선수로서의 인생을 돌이켜보면, 좋은 점도 있지만 ‘왜 이렇게 해야 되나’라는 의문점도 생긴다. 좋은 점은 야구단에 녹이려고 하지만, 해가 되는 것은 철저히 배제하려고 한다. 내 경험은 아이들에게 잘못된 훈련, 생활을 말해줄 수 있다는 것”이라며 “나 때와 다른 요즘 아이들은 보면, 정말 행복하다. 나는 야구선수만 보고 인생을 걸어왔지만, 이 친구들은 행복을 보고 인생을 걸어간다”고 언급했다.
과거와는 다르게, 야구에 대한 즐거움을 먼저 알게 해주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 김 감독의 생각이다/사진=이상엽 기자
서울 도봉구유소년야구단 김종진 감독 일문일답.
-창단한지 5년차다. 연맹 소속 야구단으로는 역사와 전통이 있는 야구단이다.
“2012년 대한유소년야구연맹에 소속되어 있던 야구단에서 코치 생활을 했다. 이후 2014년 4월에 서울 도봉구유소년야구단을 창단해 현재까지 팀을 이끌고 있다.
창단 첫 해보다는 팀이 많이 성장을 했다고 생각한다. 여러 대회에서 우승, 준우승 등 상위권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고, 몇몇 학생들은 중학교에 진학해서 프로야구선수를 꿈꾸기도 한다. 이렇게 팀이 빠르게 성장될 수 있었던 것은 나보다는 학생, 학부모님들, 코칭스태프가 모두 한 팀이 됐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1년차 때는 다소 힘들기도 했다. 첫 선수반에 5명이 갑자기 들어왔다. 5학년 중반이 돼서 야구선수를 하겠다고 한 것이다. 1년 반도 채 남지 않은 시간에서 맞춤별 교육을 진행해야 하니 내 자신이 조급했다. 코치분들이 있었음에도 내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고 스스로를 신뢰하지 못했다. 이제는 팀뿐만 아니라 나도 함께 성장하고 있다.”
-김 감독의 야구 이야기는 전형적인 비운의 스토리다. 들려달라.
“초등학교 3학년 때, 야구를 하고 싶어서 부모님에게 졸랐다고 한다. 부모님이 핸드볼을 하셔서 운동이 힘든 것을 아니까, 쉽게 하라고는 안 하셨다. 원래는 바둑기사를 하려고 한국기원 1급까지 했다. 그 당시 박찬호, OB베어스 등의 인기가 높아지던 시절이었고, 나도 야구가 점점 좋아지기 시작하면서 부모님께 야구를 하겠다고 말씀을 드렸다. 처음에는 야구를 안 시켜주니까 유니폼만 사달라고 졸랐고, 결국 부모님이 안되겠다 싶으셨는지 나를 야구부가 있는 수유초등학교로 전학을 보내주셨다.
초등학교 때 투수와 내야수를 보다가 중학교 때 투수에 소질이 있어서, 중고등학교에서 김현수(현 LG트윈스)와 원투펀치로 나섰다. 그 당시만 해도 성적도 그렇고 나쁘지 않은 시절을 보냈다. 문제는 중학교 3학년 때부터 하나 둘씩 나왔다. 당시 왕중왕전으로 불리던 대회에서 우승하려면 5경기를 치러야 했는데, 매 경기를 내가 책임졌다. 김현수도 타자로 전환한 상태였고, 다른 친구들도 타자에 두각을 나타냈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본다. 그 때 팔이 무리가 오면서 고등학교 진학 후 팔꿈치 뼛조각 제거 수술을 하게 됐고, 고 3때 팔꿈치 인대 수술, 대학에 진학해서 어깨 수술을 했다.
물론, 어린 시절부터 워낙 많은 투구를 해왔기 때문에 그 대회로 인해 내 몸이 망가진 것은 아니다. 몸에 무리가 오기 시작하면서 누적된 부상 요소들이 그 대회에서 표출된 것이다. 중학교 때부터 워낙 많이 투구를 하면서 몸이 서서히 탈이 나기 시작했던 것 같다. 대학교를 거쳐 SK 와이번스에 입단, 초반에 2군에서 어느 정도 활약하고 도약하려는데 어깨가 탈이 났다. 우완전통파 투수에서 사이드암으로 투구폼까지 변경했는데 역시나 부상이 문제였다.”
-1군 무대에 대한 열망이 있었을 법한데 생각보다 빠르게 코치, 감독의 길로 들어섰다.
“프로에서 방출되고 나서도 희망의 끈은 버리지 않았었다. 그 당시 10구단이 창단한다고 했었기 때문에 선수 수급이 이뤄질 것이라고 봤다. 좁은 문이라고 생각했지만, 도전을 해볼 생각이었다.
그러다 우연치 않게 지인으로부터 유소년야구단 코치를 해달라고 연락이 왔다. 연맹의 취지에 대해 많은 공감을 가지고 있었고, 프로 2군에서 최저연봉을 받으면서 30대 초중반에 어설프게 은퇴하는 것보다는 한 살이라도 젊었을 때 새로운 도전을 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물론, 프로선수로의 꿈을 접겠다고 하자 부모님이 매우 안타까워하셨다.
지금도 1군 마운드에서 한 번 던져봤으면 하는 마음은 있다. 우리 코치님들도 1군 무대를 밟지 못하셔서 그런지 아쉬움이 남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나 코치님들이 못했던 것, 아쉬웠던 것, 싫었던 것을 우리 야구단 아이들에게는 답습시키지 않게 하려고 노력을 한다.”
-야구를 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나는 제일 중요한 것이 인사라고 생각한다. 처음이나 마지막에 인사를 할 수 있도록 가르친다. 중간에도 ‘감사합니다’ ‘죄송합니다’나 아이들끼리 공을 맞추면 서로 ‘미안하다’ 하게끔 한다. 학부모님께도 말씀을 드리는 내용이다.
야구는 단체 운동이다. 단체 생활을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하다. 시합에 9명이 뛰는데 그 중에 한 명이 실책을 하면, 안 좋게 이야기하는 것보다 서로 격려해줘야 한다. 아이들은 정신적으로 미성숙해 어른들 몰래 놀리거나 심할 경우 편을 가르기도 한다. 야구를 재미있게 즐기려고 온 건데 상처를 받으면 다른 곳에 가서도 야구를 하지 않는다. 이런 것을 최소화하려고 노력한다. 재미있게 놀아줄 수 있는 환경, 야구 실력보다 먼저 이런 분위기가 중요하다고 본다.”
요즘 아이들은 야구단 훈련 이외에도 스스로 모여 야구를 한다. 그 이유는 생각의 차이에 있다/사진=이상엽 기자
-과거 김 감독이 했던 야구와 요즘은 어떻게 다른가.
“나는 학교 수업이 끝나자마자 운동을 하고, 운동이 끝나면 집에 갔다. 쉬는 날에는 야구를 전혀 하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초등학교 때 야구를 의무적으로 했던 것 같다.
요즘 아이들은 뭔가 야구에 대한 갈망이 크다. 여기서 훈련을 하고도 다른 곳에 가서 자기들끼리 야구를 한다. 난 그런 기억이 전혀 없다. 그 당시 나에게는 야구는 일이자 의무였는데, 지금은 말 그대로 즐기면서 한다. 이렇게 야구에 대해 달려드는 모습이 예전과 다르다.
과거에는 좋은 성적을 거둬야만 했다. 결국, 성적을 위해 던지는 아이들만 던질 수밖에 없고, 후보는 관심도 후보이던 시절이다. 그런 면에서 정말 많이 달라졌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 때는 공부는 뒷전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절대 공부를 놓지 말라고 강조한다. 야구선수를 꿈꾸더라도 다양한 길이 있기에 공부를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다른 감독님들도 나와 비슷하게 생각하시는 분이 많다. 그만큼 과거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임에는 틀림없다.”
-야구단 선수들 중 몇 명만 소개가 가능한가.
“일부 아이들만 거론하기는 부담스럽다. 나에게는 모두 소중한 제자들이기 때문이다. 굳이 이야기를 하자면, 6학년 중에 모범이 될만한 친구들이 많다.
김상원(구리 갈매초 6년)이라는 친구는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시작했다. 내가 처음 기억하는 게 넥센팬이라는 것과 초등학교 저학년임에도 불구하고 활발하고 날렵했던 것이 인상이 깊었다. 대회 때는 놀이터처럼 막 뛰어 다니고 그래서 ‘뭔가 되겠다’라고 생각했다. 4학년 때 선수반(심화학습반)을 시작해서 하고 있는데, 야구를 알고 하는 친구라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중견수와 포수를 주 포지션으로 하는데, 대회 출전을 하면 외야 타구를 따라는 것을 보면 판단력이 매우 좋다. 기습번트나 작전 플레이도 잘하고, 정근우나 이용규와 같은 전형적인 1, 2번 스타일이다. 야구를 너무 사랑하고, 연습에 빠진 적도 없다. 간혹 나에게 야구 관련 질문을 할 때가 있는데, 질문 내용이 어려워서 내가 당황스러운 적도 있다. 그만큼 똑똑한 친구다. 지금은 구리에 있지만, 곧 도봉구로 이사를 올 예정이라 앞으로 더 야구를 하겠다고 의욕을 보인다.
조재용(누원초 6년)이라는 아이는 작년 한국스포츠경제배 우수투수상을 받았다. 그 때 3이닝 노히트 게임을 기록했을 정도로 뛰어난 피칭을 했다. 유전적인 탓인지 체격이 좋아서 투수, 공 던지는데 소질이 있다. 지금도 잘하는데 중고등학교 때 더 기대가 된다. 유연성이 좋아서 부상의 위험이 적은 편이긴 하지만, 투수 특성상 한 번 무리가 오면 큰 타격을 입기에 부상에 대한 관리를 해주려고 많이 노력한다. 다행이 내가 신체 근육에 대해 관심이 많아서 어느 정도 도움을 주고 있다.
또, ‘주장’ 양지웅(장월초 6년)도 리더십이 뛰어나고 차근히 한 단계씩 스스로 끌어올린 친구도 있다. 각기 다른 스타일과 매력을 가진 친구들이 많아 다 이야기하기가 어려운 것이 아쉬울 정도다.”
(윗줄 왼쪽부터) 나담주 수비코치, 김종진 감독, 김준희 타격코치, (아랫줄 왼쪽부터) 김무진(공연초6), 이승재(창도초6), 조재용(누원초6), 양지웅(장월초6), 김상원(갈매초6), 김성주(창원초6), 서민준, 최성현(이상 창일초6)/사진=이상엽 기자
-마지막으로 한 마디.
“우리 팀의 슬로건은 선수와 코칭스태프가 함께 뛰는 팀이다. 나도 가만히 있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을뿐더러 내가 같이 하면 더 많이 가르칠 수 있고, 코치님들에게도 부담이 덜 하다고 생각한다.
현재 코칭스태프들은 모두 한 두 살 터울이다. 같이 선수생활을 했던 선후배들끼리 모여있으니, 내가 자존심만 내려놓는다면 모두가 재미있는 야구단을 만들 수 있다고 본다.
내가 강하게 나가면 코치님들도, 학부모님도, 야구단에서 뛰는 선수들도 모두 경직될 수밖에 없다. 그런 것을 내가 먼저 내려놓고 다가가고 열심히 한다면, 더 좋은 분위기 속에 훌륭한 팀이 되지 않을까 한다.”
서울 도봉구유소년야구단 양지웅(장월초 6년)
“야구단에서 야구를 한지는 3년 정도 된 것 같다. 처음에는 친구들이랑 동네에서 야구를 하다가 제대로 배우고 싶어 야구단을 찾아봤다. 처음에 취미로 시작했지만, 5학년 때쯤 선수반에서 활동하고 있다.
LG 오지환 선수처럼 실력 뛰어나고 멋진 선수가 되고 싶다. 현재 내 포지션도 오지환 선수처럼 유격수다. 앞으로 내 이름을 많이 알릴 수 있는 선수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 감독님이 잘 가르쳐주셔서 내가 열심히 한다면, 오지환 선수와 같은 멋진 선수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이상엽 기자 lsy1021@sporbiz.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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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스포츠경제 (http://www.sporbiz.co.kr/news/articleView.html?idxno=220107)